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은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으로, 기계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섬세하게 묘사한 감성 SF 소설이다. 국내 연극·뮤지컬을 거쳐 최근 워너브라더스 픽처스와 영화화 계약을 맺으며 한국 SF 문학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SF소설의 새로운 감성 | 기수 로봇 ‘콜리’의 시선
『천 개의 파랑』의 시작은 매우 특별하다. 바로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연다. 콜리는 말을 타는 기수로 개발된 로봇으로, 인간을 모방하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존재다. 사고로 인해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게 된 후, 폐기 위기에 놓인 콜리는 인간 가족들과 지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한다.
SF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분위기는 차갑거나 기계적이지 않다. 오히려 잔잔하고 따뜻하며 슬픈 순간들이 파도처럼 번진다. 콜리의 시선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특히 독자들이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한국 사회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설정해 이질감 없이 몰입하게 만든다.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라는 문장은 이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모든 존재에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멈춘 시간, 흐르지 않는 감정, 이별을 견디는 일. 인간이든 로봇이든 결국은 ‘흐름’과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자신만의 속도로 | 주로를 달리는 존재들의 이야기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의 주로’를 달리는 중이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콜리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중심에 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이 문장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구체적인 조언처럼 들린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 나의 삶의 리듬’을 찾아가도 된다는 메시지. <천 개의 파랑>은 AI나 기술 발전이라는 소재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되묻는다.
국내 무대에서 세계로 | 뮤지컬, 영화로 확장된 세계관
<천 개의 파랑>은 2020년 출간 이후, 그 감동이 무대 예술로도 이어졌다. 국립극단의 연극 무대와 서울예술단의 뮤지컬로 재해석되었고, 뮤지컬은 특히 큰 호응을 얻어 2024년에는 재공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2025년 5월, 워너브라더스 픽처스와의 영화화 계약이다. 이 계약을 통해 <천 개의 파랑>은 이제 스크린을 통해 세계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
국내에서만 2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펭귄랜덤하우스를 포함한 10여 개국에 수출된 이 작품은 이제 ‘K-SF’의 선두주자라 할 만하다.
결론: 과학보다 감정을 이야기하는 SF 소설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은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인간의 감정과 삶의 방향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정확히는 SF라기보다 감성문학에 가까운 이 책은 지금의 삶이 버겁거나, 속도를 조절하고 싶은 사람에게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그 문장이 전하는 위로가, 지금 당신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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