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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책 〈파과〉,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이자 존재에 대한 기록

by 취향기록노트 202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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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는 구병모 작가가 쓴 장편소설로,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기억, 몸에 새겨진 습관, 그리고 생존을 위한 차가운 태도. 읽는 내내 조각의 감정이 나에게까지 번져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위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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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는 “청부 살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어두운 면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단순한 범죄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삶을 버티고, 기억을 안고, 사라짐을 받아들이는지를 탐색하는 서정적인 문장으로 가득하다.

구병모 작가 특유의 장문 묘사는 처음엔 다소 숨 막히게 느껴지지만, 그 반복적인 리듬과 디테일 덕분에 조각이라는 인물에 깊이 이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패한 채소를 정리하는 장면조차 이렇게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손톱으로 긁는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조차도 ‘죽음’과 ‘소멸’의 은유로 녹여낸다. 결국 이 소설의 핵심은 한 줄로 요약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조각이라는 캐릭터, 여성 서사의 새로운 얼굴

<파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조각’이라는 인물 그 자체다.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해온 60대 여성 킬러. 나이가 들고 몸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치밀하다. 하지만 그 속엔 무너지지 않는 감정선이 있다. 과거의 상처, 잊히지 않는 장면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이들과의 관계들.

작품은 그녀를 단지 킬러로 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수도, 이웃이었을 수도 있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조명한다.
때문에 이 소설은 여성 서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고통을 지닌 여성들, 특히 나이 든 여성의 삶을 중심에 둔 이야기는 여전히 드물기 때문이다.

영화와의 비교, 상상과 재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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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에는 이 작품이 영화로도 개봉되었다. 이혜영, 김성철 배우의 열연으로 완성된 영화 <파과>는 책에서 느낀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특히 이혜영 배우의 조각은 감정선 표현이 탁월했고, 김성철 배우와의 대립 장면도 훌륭했다.

다만,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액션신이나 서늘한 묘사가 훨씬 강렬하게 느껴졌던 만큼, 영화는 시각적으로 제한적인 면도 있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 뮤지컬로도 올라간 적 있는데, 그때 봤다면 어땠을까, 조각이라는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걸 봤다면 또 다른 울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파과>는 단순한 킬러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친구, 혹은 그저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기 위해 빛난다. 그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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