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관통하는 재일조선인 가족의 삶을 그린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 1.5세 재미교포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쓰인 이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과 사랑, 이방인의 정체성을 다룬 대서사극이다. 드라마화로 더욱 주목받은 이 작품을 함께 들여다보자.
1. 평범한 삶의 위대함 | 재일조선인의 가족 이야기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 1980년대 말 일본 오사카에 이르기까지, 네 세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하숙집을 운영하던 ‘선자’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며, 그녀의 사랑, 결혼, 이민, 자녀 세대까지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존의 독립운동 중심 서사와 달리, 이 작품은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운다.
특히 선자의 인생을 통해 독자는 “살기 위해 일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견뎠다”는 말의 무게를 깊이 체감하게 된다.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또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단한 삶은 당대 사회의 현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자식 세대를 위해 가난과 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간다. 정치적 이념보다는 ‘가족’이 곧 삶의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는 모습을 통해 이민진 작가는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역사를 반영하고 이겨내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며 수많은 자이니치(재일조선인)들을 인터뷰했고, 처음 쓰던 초고를 전부 폐기한 후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민진의 문장은 담백하지만 묵직하며,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독자 앞에 서 있다.
2. 삶을 관통하는 파친코 – 차별, 생존, 정체성
소설의 제목인 ‘파친코’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조선인들이 손에 쥘 수 있었던 생계 수단이자, 차별의 상징이다. 동시에 파친코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선자의 아들 모자수와 손자 솔로몬까지 이어지는 가족사는,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문장처럼,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존 의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아무리 적응하고 노력해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고학력과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끊임없이 벽에 부딪친다.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무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비단 반세기에 걸친 가족사 때문만이 아니다. ‘자이니치’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독자들에게 그들의 삶과 정체성,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처럼 눈부시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게 치열하게, 고단하게 살아냈음을 담담하게 증언하는 작품이다.
3. 드라마 <파친코> 시즌 1·2 | 시각적 완성과 감정의 확장
2022년 Apple TV+에서 첫 선을 보인 드라마 <파친코> 시즌 1은 이민진의 원작을 바탕으로, 글로벌 감성과 섬세한 미장센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윤여정 배우가 노년의 선자 역을 맡았고, 젊은 고한수 역에는 이민호가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았다.
시즌 1은 선자의 유년기와 젊은 시절, 그리고 고한수와의 관계, 이삭과의 결혼 후 일본에서의 삶을 교차 편집 형식으로 보여준다. 영어, 한국어, 일본어 세 언어가 혼용되며, 각 문화 간 긴장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원작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되, 시청각적인 매체만이 구현할 수 있는 깊은 감정선이 클로즈업과 음악, 배경 연출로 확장된다.
2024년 시즌 2는 그 후의 이야기로, 손자 솔로몬의 성장기와 선자의 중년 이후 삶,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중심으로 다뤄진다. 시즌 2에서는 특히 솔로몬이 직장 내 차별과 기대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과, 다시 고한수와 얽히게 되는 가족사적 충돌이 주요한 서사로 펼쳐진다. 각 인물들이 선택한 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드라마 <파친코>는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분할하고, 각 캐릭터의 감정선에 충실하면서도 영상미와 음악의 힘으로 원작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문학 작품이 영상으로 옮겨졌을 때 어떻게 또 다른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결론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파친코>는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다. 역사가 외면한 수많은 ‘선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삶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드라마화로 확장된 이 감동을, 지금 다시 읽고 기억해보자. 이민진 작가가 수십 년간 간직해온 이야기는 이제 전 세계 독자와 시청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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