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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책 <위대한 그의 빛> | 뉴욕에서 서울로, 공간이 바뀐 위대한 개츠비

by 취향기록노트 202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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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의 장편소설 <위대한 그의 빛>은 <위대한 개츠비>의 원형 서사를 한국 서울이라는 배경 위에 치밀하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욕망, 사랑, 신화화된 인물,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만들어낸 계급의 풍경을 성수동과 압구정동이라는 서울의 두 지역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낸다. 고전의 재해석으로서도, 한국 사회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담아낸 작품으로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1.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성수동과 압구정이라는 한국의 풍경

<위대한 그의 빛>은 단순한 ‘현대판 개츠비’가 아니다. 원작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 서사를 가져오되, 2020년대 서울이라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공간 위에서 재구성된다. 주인공 제이 강은 강재웅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기억에 머무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실현해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꿈은 다름 아닌 유연지라는 인물과의 재회다.

소설은 성수동과 압구정동이라는 지역의 대비를 통해 ‘뉴머니’와 ‘올드머니’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심윤경 작가는 뉴욕 롱아일랜드 만에서 개츠비가 바라보던 초록 불빛처럼, 성수동의 T타워에서 압구정동 H아파트를 바라보는 구성으로 서울판 개츠비를 재현한다.

성수동은 새롭게 부상한 개발의 상징이고, T타워와 제이 강의 펜트하우스는 한국형 신화가 탄생한 무대다. 반면 압구정동은 오래된 부와 전통, 지켜야 할 품위를 상징한다. 연지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개츠비가 갈망하던 초록빛 집이자,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심윤경 작가의 뛰어난 사회 분석력과 상징적 연출을 동시에 보여준다.

2. ‘제이 강’이라는 신화, 빛을 좇는 자의 허무함

강재웅에서 ‘제이 강’으로,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 신화적 인물은 외형적으로는 완벽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버드, 서울대 수석 졸업이라는 화려한 스펙에 바이오 스타트업 성공, 그리고 에클코인이라는 가상화폐로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인물.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유연지와의 재회.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사랑이 아닌 이상화된 장면으로서만 존재한다. 수십만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된 ‘그 순간’은 현실의 연지와는 무관한 것이며, 그가 추구한 사랑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닌 집착이자 환상이다.

소설은 이 허구적 서사를 화자인 이규아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게 한다. 규아는 제이 강의 세계에 매혹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감을 두고 냉소적으로 관찰한다. 그녀는 재회의 연출자로서 기능하면서도, 독자에게 감정적 균형감을 제공하는 내레이터다. 그녀의 시선은 단순한 해설이 아닌, 우리가 이 빛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유도한다.

3. 유연지와 규아, 중심으로 이동한 여성 서사

<위대한 그의 빛>은 단순한 성별 반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변부에 머물던 여성 캐릭터들이, 이 작품에서는 중심 축으로 이동해 서사를 주도한다. 특히 유연지는 단순한 욕망의 대상이 아닌, 자신만의 상처와 생존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연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삶이 타인의 욕망으로 소비되어 왔음을 자각한다. 그녀가 낳은 아들의 존재 역시 원작과는 달리 여성의 시선에서 재해석된다. “그래, 아들이 좋아. 커서 바보나 되겠지. 남자애가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라는 연지의 말은 데이지의 “귀여운 바보가 되라”는 발언을 반전된 위치에서 다시 읽게 만든다.

또한, 조던 베이커에 해당하는 인물은 골프선수를 꿈꾸는 ‘민경훈’으로 등장하며, 남녀 성별의 전환을 통해 성역할과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성별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은 사회의 아이러니. 이 모순은 작품 내내 유효하게 작동하며, 소설의 감정적 복잡성을 더한다.

심윤경은 이 작품을 통해 ‘고전은 새롭게 다시 써야 한다’는 당위를 보여준다. 우리가 여전히 욕망과 사랑, 계급과 신화의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면, 그것을 현재형으로 다시 읽고 다시 써야 할 책임 또한 함께 존재한다.

<위대한 그의 빛>은 단순히 <위대한 개츠비>의 한국 버전이 아니다. 지금, 이곳 서울의 풍경과 인물로 고전의 서사를 재해석한 놀라운 문학 실험이다. 공간이 바뀌고 인물이 달라졌지만, 인간의 욕망과 상처는 여전히 유효하다. 성수동과 압구정, 뉴머니와 올드머니, 신화와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빛’을 좇고 있는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이 한 권의 소설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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