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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연뮤

뮤지컬 '렘피카' 후기 : 시대를 앞선 아르데코의 미학 (김선영, 린아, 김호영, 김우형)

by 취향기록노트 202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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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뮤지컬 렘피카

Synopsis: 시대의 격랑 속에 붓을 든 여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불길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파리로 망명한 폴란드 귀족 타마라 드 렘피카. 낯선 땅에서 무능력한 남편 타데우스와 어린 딸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그녀는 생존을 위해 붓을 든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아르데코'라는 독보적인 화풍을 개척하며 사교계의 스타로 떠오르지만, 자유로운 뮤즈 라파엘라와의 만남은 그녀의 예술혼과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점차 거세지는 파시즘의 광기와 2차 세계대전의 전조 속에서, 타마라는 자신의 예술과 사랑, 그리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1. 안식처이자 틀이었던 가정, 그리고 자아의 확장

작품은 단순한 성공 신화에 머물지 않는다. 남편 타데우스와 뮤즈 라파엘라라는 두 사랑 사이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해가는 과정은 지독하리만큼 치열하다. 특히 딸에게 '엄마'보다는 '셰리(Chéri)'라고 불리길 원했던 그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이는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라는 역할에 갇히지 않고 독립된 여성 예술가로서 존재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녀에게 가정이란 지키고 싶은 안식처인 동시에, 스스로 넘어서야 할 틀이었다.

2. 예술을 삼킨 광기, 그리고 다시 잡은 붓

2막에서 예술적 동료였던 마리네티가 파시즘에 경도되는 지점은 소름 돋는 연출이다. 예술이 권력의 도구가 되고 광기가 일상을 덮쳐오는 시대의 공포가 무대 위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런 절망 속에서 무너졌던 타마라 앞에 나타나,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 차리고 붓을 들라며 호통치듯 독려하던 남작부인의 메시지('Just This Way')는 극 후반부의 가장 강력한 터닝 포인트였다.


뮤지컬 렘피카

3. 부부페어의 케미와 압도적인 넘버들

2024년 <하데스타운> 이후 오랜만에 만난 김선영&김우형 부부페어는 역시나 완벽한 케미를 보여주었다.

특히 김선영 배우'Woman Is'는 전율 그 자체였으며, 다시금 박제되어야 할 명장면임을 입증했다.

  • 린아 라파엘라: 눈을 뗄 수 없는 비주얼과 더불어 'Don't bet your heart', 'The most beautiful bracelet' 두 곡에서 보여준 감정선이 훌륭했다.
  • 김호영 마리네티: 기존 이미지와 달리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톤의 연기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4. 현대적 미학을 완성하는 음악적 다양성

기존 뮤지컬들이 특정 멜로디의 반복(Reprise)을 통해 서사를 쌓아가는 고전적인 방식을 택한다면, <렘피카>는 그 틀을 과감히 깨뜨린다. 리프라이즈를 최소화하는 대신 재즈, 팝, 록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롭고 현대적인 음악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마치 렘피카의 캔버스가 매순간 새로운 색채와 강렬한 선으로 채워지는 과장과 닮아있다.

반복되는 선율이 주는 익숙한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각 장면의 감정선에 최적화된 고유의 넘버들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덕분에 관객은 지루할 틈 없이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고정된 문법에 갇히지 않은 이 음악적 실험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갔던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대를 뚫고 나온 타마라 드 렘피카의 선명한 직선들처럼,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그려낸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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